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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76 호 [교수칼럼] 완벽한 교수, 그저 그런 교수

  • 작성일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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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람

배희분 교수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과)


아동과 청소년의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다루는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부모의 말은 “선생님, 도대체 우리 애가 왜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유를 좀 알려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상담이 수많은 고비를 넘어 드디어 “아하, 우리 아이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군요. 제가 더 좋은 부모가 돼야겠네요!”라는 부모의 고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자녀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부족하던 부모가 문제에 있어 자신이 끼친 영향력을 알게 되고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 왜 ‘모든’ 경우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부모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자녀의 ‘문제’보다는 아이와 부모 간의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이 상담실에 올 때 가지고 오는 호소문제들은 보다 근원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이 현실과 일상에 표출되는 일종의 증상에 불과한 일이 많다. 여러 가지 상담이론들 중에 인간사에 있어 온갖 어려움이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관계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라고 보는 이론이 대상관계이론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부모와의 초기 상호작용에서 경험한 것들이 자녀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이후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즉 태어나서 맨처음 만나게 되는 양육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전 생애에 걸쳐 타인을 지각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본적인 구조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대상관계이론의 중요한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생전에 엄마와 아이 약 6만여 쌍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아이를 망치고 힘들게 하는 엄마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 즉 자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은 채 모든 필요를 앞서서 미리미리 채워주는 엄마라고 일갈했다. 위니컷에게 있어 좋은 엄마는 퍼펙트 마더가 아니라,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도 주지만 동시에 살다보면 으레 겪을 법한 적절한 좌절도 주는 엄마인 굿 이너프 마더(good enough mother),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저 그런 엄마’, ‘그냥 괜찮은 엄마’, 혹은 ‘그만하면 충분한 엄마’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완벽한 부모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완벽해지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쏟다보면 정작 그러한 노력이 목적해야 할 자녀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진짜 좋은 엄마는 아이에게 적당한 좌절을 주어서 그 좌절을 통해 자녀가 자신만의 힘을 발견하고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게 해주는 엄마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는 엄마, 그저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은 엄마, 아니 바쁠 땐 가끔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만 곧 돌아올 거란 믿음을 주는 엄마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문득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그 문제에 대한 이해도 통찰도 없었던 부모가 상담을 통해 부모로서 자신이 부족했음을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자녀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자칫 굿 이너프 마더가 아니라 퍼펙트 마더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결심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이의 욕구를 다 채워준다는 미명하에 실은 부모 자신의 욕구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부모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그들은 흔히 “도대체 뭐가 문제니?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잖아.”라고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 비싼 개인 과외며, 바이올린 교습이며, 발레수업을 시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것도, 심지어 고기 먹고 나면 반드시 밥도 한숟갈 먹어야 속이 편하다며 도리질하는 아이 입에 밥을 떠먹이곤 했던 것까지도 실은 자녀의 욕구와는 거리가 먼, 투사된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위험은 비단 부모-자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자칫 퍼펙트 프로페서가 되고자 하는 욕구로 자신과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의 사랑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교수, 존경받는 교수가 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자신의 욕구와 제자의 욕구를 혼동할 수도 있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업적과 성과를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높은 윤리적 잣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오히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관계의 기본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자질과 함께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교수에게도 필요하다. 강의평가는 우수하지만 논문쓰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고, 연구 업적은 뛰어나지만 학생들과 소통이 유난히 힘든 사람도 있다. 자신의 굿(good)과 배드(bad)를 잘 통합하여 인식하는 교수가 학생들의 굿과 배드도 통합하여 볼 줄 알며, 이렇게 통합된 사제관계 속에서 비로소 교수는 학생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저 그런 교수, 그만하면 충분한 교수도 괜찮다.